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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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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있는 것들의 비애.. 한때 선녀콤플렉스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나는 날 수 있고 마땅히 날아다녀야 하는 존재인데, 뭔가 착오 때문에 아니면 어떤 부조리에 걸려들어 여기 이렇게 쳐박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편했다. 구겨진 날개를 옷장 맨 아래 서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꺼내 다시 날아오를 거라는..라는 야무진 꿈을 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최소한 날아오르는 일에 대한 환상은 깨진 거 같다. 날아오르면 어쩔건데.. 하늘에는 굶주린 더 큰 새들이 있고, 벌레라도 잡으려면 온종일 땅을 살펴야 하고, 운좋게 잡은 통통한 벌레는 삼키지도 못하고 둥지에서 기다리는 새끼들 입에 고스란히 넣어주어야 하는 걸. 심지어 적당한 날씨를 찾아 바다를 건너야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그냥 생긴대로 사는 게..
지나온 길..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의사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 줬다. 공들여 세차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걸 목격한 순간의 얼굴이 저럴까. 내시경 카메라에 불길한 조짐이 잡혔다고 한다. 아직은 확실치 않으니 2개월 후에 보자고 했다. 다시 수술을 해야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한번 걸었던 길이니 조금은 견딜만 할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 2개월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에 집중하자고 다짐한다. 숨쉬는 거 까먹지 말고 최대한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어야겠다. 그 길밖에 없으니..
자연스러움.. 숲속 어딘가 개울에 나무 하나가 쓰러져 눕는다. 나무는 천천히 썩어가고 그 위에 운 좋은 씨앗들이 떨어져 자리를 잡는다. 죽은 나무를 양분 삼아 다양한 식물이 자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연이 탄생한다.
연두빛 버티기..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춘삼월 만만한 바람에 위아래로 몇 번 크게 휘어질 때만 해도 마냥 유쾌했거든. 유연하게 휘어지는 기술을 터득한지 오래라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툭 부러졌어.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인 거야. 끝이라고 생각했어.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들은 알지. 내려앉는 건 한순간이지만, 원상태로 돌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이 상태로 뒹굴다 시간이 흐르면 말라붙어 부서지고 어느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질 거야. 나쁘진 않아. 인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때 그녀가 나타났지. 숱 많은 곱슬머리에 뽀얀 피부, 작은 몸집의 그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깡총깡총 걸어오다가 문득 내 앞에 멈춰 섰어. "안녕, 여기서 뭐 해?" 쪼그리고 앉아 한..
꽃을 볼 자유.. 꽃을 보는 건 죄가 아니야. 눈이 가는 걸 어떡해. 꽃을 보는 게 죄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죄고, 비에 젖는 것도 죄고, 햇볕에 그을리는 것도 죄라는.
오십대.. 시간은 항상 찔끔찔끔 흐르는데, 지나고 나면 뭉텅 빠져나간 느낌.. 피어있는 꽃보다 떨어진 꽃잎에 더 눈이 가는 시절.. 식은 사랑에 기대어 천천히 거닐다 만나는 세상..
흐름.. 새들이 날아오고 다시 날아간다. 나무들이 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는다. 오늘 아침도 어제 아침처럼 먼지와 햇살과 온기가 나를 감싼다. 늘 혼자지만 돌아보면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문이 또 닫혔지만.. 3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다. CT를 찍고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피를 뽑고 소변을 담아 제출한다. 그리고 방광 내시경을 한다. 젠장. 방광 내시경은 정말 싫다. 못견딜 정도로 아픈 건 아니지만, 못견딜 정도로 수치스럽다. 멀쩡하던 사람을 한순간에 병자로 전환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머리 위에 달린 모니터로 방광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핏줄이 곤두선 부분이나 약간 부풀어 보이는 곳이 나타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검사하시는 분이 멋진 풍경이라도 만난 것처럼 냅다 셔터를 눌러댄다. 바짝 쫄아 뭔가 이상이 있는 거냐고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검사가 끝나면 겸허한 마음으로 진찰실 문 앞에 앉아 기다린다. 문이 열리면 나와 비슷한 안색을 한 환자가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다시 문이..
애완달.. 저기 우리 집 지붕 위에 달 올라가는 거 보이지? 저 달 우리집에서 키우는 거야. 저녁 먹기 전에 아빠가 문 열어주면 나가서 밤새도록 놀다가 새벽에 몰래 뒷문으로 들어오거든. 우리 집 달이니까 볼 때마다 나한테 100원씩 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간의 흐름을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손톱만큼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찰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알량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애쓰고 애써봤자 지나가면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헛될 뿐이다. 오십두 해를 살아 알게 된 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뿐이고, 반짝이는 가치를 좇아 헤매다 도착한 곳은 결국 빙빙 돌아 제자리이다. 살면 살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점점 더 모르겠다. 이게 정상이다. 인류 역사상 단 몇 명만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물며 백 명이 안 되는 무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본 적이 없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허무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
퇴근길.. 해 뜨는 거 보면서 출근해서 달 뜨는 거 보면서 퇴근. 딱히 불만은 없는데, 오늘처럼 달 밝은 날엔 목 아래 박힌 뜨거운 덩어리가 부풀어 올라 그냥 두면 위험하다. 서둘러 집에 가서 옷장 맨 아래 서랍에 숨겨둔 날개를 꺼내 오랜만에 날아올라야겠다. 서쪽 하늘 한 바퀴 가볍게 돌고 오면 좀 나아지겠지.
직박구리.. 창틀에 땅콩 몇 알을 잘게 부셔 놓아 두었더니 새들이 찾아온다. 주로 직박구리와 박새.. 대개는 먹이를 물고 황급히 날아가버리는데, 이 직박구리 녀석은 한참 머물면서 집안을 살폈다. 혹시 고마운 걸까? "이봐, 다 먹었으면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가서 박씨나 물어오렴..." "내가 가져온 박씨에서 뭐가 나올지 알고요?" "니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는데, 설마 나쁜 게 나오겠어?" "땅콩 몇 알에 금은보화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아이패드 프로 11 스페이스그레이..
트리몬..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마주치는 나무괴물.. 늘 표정이 바뀌는데,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
저기 어디쯤에.. 그날 이후, 죽음은 구두 뒤축에 붙은 껌딱지처럼 걸을 때마다 찔꺽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술 부위에 불길한 통증이 느껴질 때, 암 보험 가입하라는 홍보 전화를 받았을 때(이미 걸렸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면 그만이지만), 입원실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코드블루 방송이 환청으로 들려올 때, 유혹을 못 견디고 마신 캔맥주의 차가운 쓴맛이 죄의식과 함께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갈 때, 자다가 눈을 떴는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샤워하다가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질 때, 퇴근길 지하철 유령같은 사람들 틈에 끼어 집에 돌아올 때, 본의 아니게 미래를 계획해야 할 때... 느껴진다. 저기 어디쯤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은 무죄.. 모퉁이를 돌아도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재미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에서 살짝 고개만 들어도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아무도 땅에 코 박고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화나는 일, 더러운 일, 짜증나는 일만 눈 빠지게 들여다 보면서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고 한탄하면 어쩌란 말이냐. 세상은 아무 잘못 없는데...
나무의 시간..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는다. 겨우 오분 정도 지켜보고 "나무는 움직이지 않아"라고 단정짓는 것은 얼마나 성급한 일인가. 변하지 않으려 버텨 봤자 소용 없다. 당장은 의미 없어도 어떻게든 꼼지락거려 보는 게 낫다. 5mm만큼 키가 자라고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기를 쓰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