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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여행

동경_140704-3

하루 일정을 마치고 피곤에 쩔어 호텔에 도착... 잠깐 쉬었다가 저녁을 해결하려고 밖에 나왔는데, 뭘 먹어야 할지 막막하다. 호텔 식당에서 대충 때울까 하다가 이왕이면 여행자 느낌을 내보고 싶어 이케부쿠로를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라면은 실패할 확률이 높고, 패스트푸드는 안 땡기고, 진짜 먹고 싶은 건 스시나 초밥이지만 들은 얘기가 많아 참기로 했다. 결국 수십 개의 음식점을 기웃거린 끝에 쭈볏거리고 들어간 이탈리안 레스토랑. 부담 없는 까르보나라를 시키려다가 옆자리 커플이 먹고 있는 스테이크에 필이 꽂혔다.   



수십 장에 달하는 메뉴판에서 간신히 스테이크라고 써 있는 메뉴를 찾아 고르긴 했는데.. 현빈을 약간 불려놓은 듯한 얼굴의 웨이터 녀석은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게 없다. 그냥 알아서 갖다주면 좋으련만 빵과 밥 선택, 샐러드 드레싱의 종류, 스테이크의 익힌 정도를 설명하는 데 십여 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와인을 선택하라고 해서 "화이트와인"이라고 얘기했는데, 내 영어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고심하다가 어디론가 달려가서 와인 사진이 인쇄된 별도 메뉴판을 가져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이었다. 사진 중에서 화이트와인을 손가락으로 찍어 보여주니, 그제서야 "아, 와이또"라고 외치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솔직히 맛은 별로다! 동네 스테이크 전문점은 고사하고 웬만한 패미리레스토랑 스테이크에도 못미치는 정도.. 근데 지나칠 때마다 맛있냐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불린 현빈 같은 웨이터 녀석 때문에 맛있다는 표정으로 먹어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 웨이터 녀석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일본어로 한참을 떠들어댄다. 내가 일본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렇게 열심히 설명하는 걸 보니 꽤나 중요한 일인 거 같은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결국 유일하게 연습한 일본어인 "와따시와 니혼고가 하나세마센"을 외치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또 어디론가 달려가 종이와 펜을 가져온다.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데,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와 빵, 샐러드, 와인을 그린 후 커다란 동그라미로 묶고 2600엔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그 옆에 스프와 작은 접시, 그리고 커피를 그린 후 더 큰 동그라미로 전체를 묶고 2700엔이라고 적는다. 아하! 100엔만 더 내면 세트메뉴로 먹을 수 있다는 얘기로군. "오케이~" 그제서야 완쾌 판정을 받은 고질병 환자 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간 불린 현빈은 바로 에피타이저와 스프를 들고 온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2600엔 내고 주어진 음식만 먹고 사라졌을 텐데, 100엔을 더 벌기 위해서 그렇게 그림까지 그려 가며 열심히 설명한 걸까? 다시 오지 않을 게 뻔한 외국인 관광객에게 세트메뉴를 설명하기 위해 들인 공은 최소 100엔 어치는 넘어 보인다.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새삼 놀랍다. 이런 서비스 마인드는 학습이나 연습을 통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리라. 좀 엄살 같지만.. 지금의 일본이 결코 우연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다. 



식사를 마치니 테이블을 치우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내온다.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을 땐 써비쓰~ 라며 또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 불린 현빈 같은 웨이터.. 내가 여자였으면 아무래도 넘어갔을 거 같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