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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삼릉의 가을.. 파주삼릉을 처음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숨이 쉬어졌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허파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나무와 꽃, 하늘.. 모든 것이 내가 살아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무덤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세상에 복귀한 기분.. 중증 질환을 앓고 난 후 소소한 풍경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신비한 능력을 보유하게 된 걸까. 어찌됐건 그 후 파주삼릉은 내 인생스팟이 되었다. 비슷한 사례로는 아이유의 , 아서 프랭크의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main/main.do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대단한 기록물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한 말, 그에 대한 왕의 대답, 매일 머리 싸매고 논의한 갖가지 사안들, 다툼들, 전염병과 가뭄, 홍수로 인한 근심, 누구를 등용하고 누구를 내쳐야 하는지, 누구를 벌주고 누구를 사해야 하는지, 심지어 유성이 어디에서 나타나 어디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다. 나라가 휘청할 정도의 큰 사건부터 실소를 머금게 되는 시시콜콜한 사건까지..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기록한 500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 현명한 후손들은 그 내용을 누구나 볼 수 있게 온라인 공간에 통째로 올려 놓았다. 가끔 짬 날 때마다 랜덤으로 ..
"오빠, 그거 다 가짜야.." "오빠, 그거 다 가짜야. 억지로 애쓰지 마. 그냥 편한 얼굴로 가만 있어. 그게 진짜 문상태지." 드라마 보다가 또 끅끅 대고 울었다. 요즘 들어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는...
기다리는 나무들.. 나무는 가만히 서서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시간을 맞는다. 나무는 대열을 이탈하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나무는 몰래 키를 키워 하늘에 닿기를 기다리고 조바심에 폭주하는 인간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땅속 깊이 숨겨진 진심을 꾸역꾸역 끌어올리길 기다린다. 나무는 웬만해선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
나무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1. 속초 가는 길에 화상 입은 나무들이 유령처럼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차를 세웠다. 끔찍했던 작년 산불의 흔적.. 처음 접하는 처참한 모습에 차에서 내려 한동안 말도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 불탄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집앞 공터에 서있던 메타세콰이어 십여 그루가 베어진 걸 발견했을 때도 잉잉 울면서 집에 들어왔던 아내다. 비교적 둔한 감성의 소유자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여린 마음에는 더 감당하기 힘든 풍경이었으리라. 2. 산불이 나면 숲은 20년 이상 경과해야 불 나기 전의 70~80%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나무의 경우 산불 이전 수준까지 성장하려면 3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동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토양 미생물이 활동을 재..
그림을 그린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 아주 어렸을 때 피아노를 시도했지만 빠르게 포기했다. 그때 꾸준히 계속했으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내가 원하는 수준은 휘파람 불듯이 내가 원하는 음을 자유롭게 연주하는 정도인데, 바이엘 상하권을 거쳐 체르니에 도달하는 동안 음표를 보고 기계적으로 손가락 놀리는 기능만 발달하고, 정작 악보가 없으면 아무것도 칠 수 없었다. 그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포기했다. 그때 좋은 선생님을 만났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라고 회한에 젖는 건 쓸 데 없고 멋대가리도 없으니까 많이 늦었지만 일단 시작한다. 남의 기준에 맞추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 그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깝지 않게 보내는..
카페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 또 웅성거리는 카페에 나와 앉아 있다. 굳이 헤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애써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무시해가면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렇다. 읽는 게 아니라 들여다 보는 게 맞다. 페이지는 넘어가지만 머리에 입력되는 건 없으니까. 예가체프는 어느 카페에 가든 실패할 확률이 적다. 강한 산미에 웬만한 디테일은 뭉뚱그려지기 때문이다. 카페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 집에 있을 때보다 1.5배 정도. 천정의 높이, 벽의 재질, 테이블 배치, 의자 등받이의 각도, 조명, 음악 등에 따라 최대 3.2배까지 느려지기도 한다. 장수의 비결은 죽는 나이를 늦추는 게 아니다. 백살까지 살았더라도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정신 못차리는 사이에 삶이 끝난다면 장수했다고 보기 어렵다. 중요한 건 시간이 천천..
예전엔 말이야.. 예전엔 말이야. 내 안에 사랑이 가득했어. 정확히 말해서 뱃속에 사랑이 가득했지. 날 좋은 오후엔 번갈아 내 뱃속에 연인들이 들어왔거든. 조심조심 들어와서는 흔들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페달 밟는 노동 따위가 뭐가 그리 재미 있다고 10초마다 웃음이 터지곤 했다니까. 보통 5분쯤 지나면 안정되는데, 그때부터는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거나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좀 로맨틱한 커플은 서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지. 그러다 갑자기 용기를 낸 남자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 물 한 복판으로 나가거든. 다른 오리배들과 멀찍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쭈뼛거리며 뽀뽀를 시작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한 시간쯤이야 순식간에 지나가지. 뭐, 예전엔 그랬단 말이야. 지금은 보시다시피 뱃속이 텅 비었어. 너..
노란 꽃 프로젝트.. 길 가다 꽃이 피어 있으면 쪼그리고 앉아 한참 들여다 본다. 요즘 멈춰 서서 꼼꼼히 들여다 보는 대상이 꽤 많아졌다. 어쩌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듣는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는 하현우의 '돌덩이'를 열다섯 번 따라 불렀다.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최소 삼 주 이상은 이 노래만 듣게 될 전망이다. 점심시간에 내가 원하는 메뉴를 먹기 위해 혼밥을 시작한지 꽤 됐다. 20분 걸어서 미리 찍어둔 식당에 도착해 20분 동안 먹고 다시 20분 동안 복귀한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음에 드는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 최대한 집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꾸역꾸역 보내야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이 불합리한 시..
반짝이는 시간 위에 나를 띄워 놓는다.. 발버둥쳐도 소용 없다는 걸 알았다. 벗어날 궁리 하지 말고 헛된 꿈도 꾸지 말고 관대한 시간의 흐름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것. 욕심 부리거나 서두르다가 놓칠 수 있는 소중한 것부터 챙기는 것. 의심과 허무, 그밖의 모든 집요한 암세포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나에게 주어진 작은 영토를 지켜 내는 것. 딱 요만큼.
파주삼릉 재실의 아그배나무.. 파주삼릉에 가면 입구 초입에 재실이 있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무심코 문에 들어섰다가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간에 펼쳐진 다른 차원의 풍경.. 아그배나무였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끙끙 앓다가 마침내 머리가 폭발하는 순간 차가운 공기와 만나 그대로 굳어버린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무 한 그루가 이렇게 압도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치 않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그배나무는 한국과 일본에 분포하는 장미과 사과나무속 나무이다. 배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열매가 작은 배모양으로 생겼다는 이유로 아그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월말에서 5월 중순까지 꽃이 핀다니, 잊지 않고 이 모습을 챙겨 보려면 캘..
퇴근길.. 출근길은 마음이 급해서 네비가 지시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가는 편인데, 퇴근길은 항상 정해진 코스로 달린다. 양화대교북단에서 강변북로로 들어서 자유로를 타고 달리다가 판교,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일산으로 들어서는 코스.. 네비가 길이 꽉 막혀 있으니 다른 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집요하게 졸라도 결코 듣지 않는다. 중증 길치인지라 겨우겨우 익힌 단순한 코스가 마음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진짜 이유는 열 번에 한 번쯤 뭉클한 노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날도 환상적인 노을까지는 아니었지만 하늘빛이 꽤 좋았다. 차가 더 꽉 막혀 오래 이 길에 머물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POINT.. 요즘 부쩍 집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며칠 게으름 피우고 치우지 않으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읽고 있는 책에서 "남자는 책상에서 힘을 얻는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격하게 공감하며 인터넷 쇼핑몰에서 나에게 걸맞는 적당한 책상을 찾아봤는데, 구입해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아쉽게 접었다. 방마다 꽉꽉 차 있고, 벽마다 주렁주렁 걸려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좀 더 큰 집을 마련해야 할까? 적당한 집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80평 아파트에 살면 좀 넉넉해질까? 아무리 큰 공간이 있어도 어느 순간 다 채우고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게 인간이다. 우리는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도무지 비어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애쓰고 넓힌 영역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끊임없..
선인장 오누이.. 주말 내내 지켜봤는데, 얘네 둘 하루 종일 꼼짝 않고 붙어 앉아 창밖만 보고 있더라. 해가 지면 노란 선인장 아빠와 빨간 선인장 엄마가 뚜벅뚜벅 집 앞에 나타날 것 같아 나도 자꾸 창밖을 보게 되네.
나에게 닥친 불행을 팔아 카메라를 샀다.. 다행스럽게도 암 보험을 두 개나 들어두었다. 암 진단만 받으면 무조건 1000만원을 받게 되는 이 보험을 들 때 설마 보험금을 수령하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온갖 불길한 내용으로 가득한 서류들을 바리바리 챙겨 보험회사에 갖다 줬더니 암세포가 근육층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험금의 20%만 지급할 수 있단다. 진단서에는 분명 암이라고 적혀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져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비슷한 사례로 분쟁이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보험회사의 횡포에 맞서 암 진단비를 전액 다 받아주겠다는 손해사정인 광고도 눈에 띄었다. 한참 고민하다 그냥 따지지 않고 20%만 받기로 했다. 내 방광에 자리잡은 암세포들이 변변치 않아 근육층을 침범하지 못했으니, 20%라도 감사하며 받고 ..
돌고 돌아 도착한 내 자리.. 제대한 아들에게 방을 내주고 이리저리 떠돌다 마련한 내 자리. 아내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구조이다. 이래봬도 나름 안정감 있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재택 근무 때 제법 업무에 몰입할 수 있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자꾸 말을 걸어 흐름을 끊어놓는 건 살짝 아쉬운 부분. 그래도 늦은 밤 스탠드를 켜놓고 둘이 앉아 있으면 급조한 뗏목을 타고 서로에게 의존해 바다를 항해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 ➊ 2016년 10월 9일 최인아 책방에서 발견한 1인 소파. 책 읽을 때 딱일 것 같아 눈도장 찍어 두었다가 2017년 4월 아내 생일 선물로 구입(까사미아) ➋ 2018년 7월 1일 목공 수업의 세 번째 결과물. 아카시아 집성목으로 만든 스툴 겸용 책꽂이. 모양과 씀씀이가 마음에 들어 나중에 하나 더 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