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가 나와 버렸습니다. 분단, 간첩, 국정원.. 지금까지 수도 없이 다루어졌던 식상한 소재인데
이 영화에서는 뭔가 좀 다른 색깔이 입혀졌습니다. 피를 나눈 가족도 아니고, 안타까운 사랑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그림자로만 찾아볼 수 있고, 그냥 남자들끼리의 우정이 큰 흐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이 강조되고, 몸과 몸이 부딪치고, 각자의 이해 관계가 얽힙니다.
지금까지 큰 줄기를 그리느라 가려졌던 가지들이 살아납니다.
장훈 감독은 '영화는 영화다'에서 처음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 첫 영화도 예사롭지 않았죠.
무리스러워 보이는 영화를 무리스럽지 않게 끌고 나가는.. 뚝심 있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감정선을 잘 잡아 흐름을 타는 데에도 능숙하고, 어느 순간 덩어리를 생짜로 툭 던져서
관객들을 당황하게 하는 면도 있는 것 같네요. 젊은 감독답지 않게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 보입니다.
배우들은 최고입니다. 감독이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관객이 운이 좋은 걸까요?
특히 송강호 씨의 연기는 완벽하네요. 이 분은 정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건지, 지독하게 영악한 건지
연기만 보고서는 판단이 안 될 정도입니다. 동선이나 표정, 대사 치는 게 미리 계산된 거라면
정말 지독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거라면 천재인 거겠죠.
따지고 보면 참 비슷비슷한 캐릭터를 계속 끌고 가는데도 식상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송강호 씨는 뭐 그렇다 치고, 강동원 씨도 이 영화에서는 온전히 자기 옷을 입은 것 같습니다.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인데, 막상 붙여 놓으니까 그림이 되네요.
송강호와 강동원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들의 화해에 위협을 가하는
"그림자"라는 존재입니다. 한물 간 이데올로기의 망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며 공포와 폭력을 조장하는
할아버지 터미네이터죠.. 잔잔하고 평온하던 화면이 이 할아버지만 나타나면 끔찍한 피비린내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가만히 들여다 보면 끝간 데 없는 분노와 독선으로 똘똘 뭉친
어떤 분들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런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젊고 날렵한 킬러 대신
중후한 느낌의 노신사로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간첩인 송지원은 대조적입니다. 할아버지 터미네이터가 일가족을 몰살할 때 아이의 눈을 가리고,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친 베트남 여인을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데올로기에 젖어
살아왔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기본적인 예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일과 돈밖에 모르는 남한의 이한규를 변화시킵니다. 또 변화된 이한규의 우정이
다시 송지원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연쇄반응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 아니겠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