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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여행

뉴욕 여행기 05-4 [브로드웨이 뮤지컬]



간신히 시간에 맞춰서 타임스 스퀘어에 도착했다. 아침에 예약한 뮤지컬은 위키드.. 라이온킹은 나중에 조카들이랑 보기로 했고 오페라의 유령은 매형이 싸게 표를 구할 수 있다고 해서.. 혼자 보는 첫 뮤지컬은 결국 위키드로 낙점됐다.


타임스 스퀘어의 tkts에 가면 뮤지컬 티켓을 25%에서 50%까지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오래 줄을 서서 기다려야 되는 건 기본이고, 좌석을 지정할 수 없으며, 현금으로만 구입이 가능하다. 또, 몇몇 인기 있는 뮤지컬 티켓은 구할 수 없다. 불행이도 위키드는 할인권을 구할 수 없었다.  


위키드가 공연 중인 거슈인 극장... 아침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 

  
타임스퀘어를 좀 헤매다 다시 가 보니.. 매표소 중 핝 곳에 불이 켜져 있고, 최소 여든살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예매는 이 분 혼자 담당하시나 보다. 흠, 이거 뭔가 이상한데.. 첨단 시설과 세계 최대 규모의 멋진 인테리어 등을 기대했는데.. 시골 구멍가게처럼 너무 허술한 거 아닌지.. 쭈뼛거리며 다가갔더니 컴퓨터로 뭔가를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길을 보낸다.  

 - 안녕하세요. 티켓 한 장 주세요. 
 - 111달러 25센트입니다.
  (100달러 지폐와 10달러 한 장, 5달러 한 장을 내미니까 할아버지가 100달러를 불에 찬찬히 비춰본다.)
 - 어디서 왔어요?
  (대놓고 위조 지폐인지 확인하는 건 그렇다치고.. 취조하는 듯한 이 태도는 뭔가..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 한국에서요. 
  (내 표정이 굳어지는 걸 눈치챘는지 살짝 미소를 보이는 할아버지..)
 - 어떤 좌석을 원하세요?
 - 무대에서 가까운 곳으로 주세요.
  (할아버지.. 뭔가를 두들기고.. 확인하고 한참 부산을 떨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종이 한 장을 내민다.)  
 - 자, 보세요. 최고로 좋은 좌석이에요.
  (할아버지가 내민 건 좌석 배치도... 무대에서 10번째 줄.. 정중앙이다. 와우~ 괜찮네...) 
 - 히히... 감사합니다. 
 - 6시 30분까지 꼭 오셔야 합니다. 
 - 오케.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봉투에 티켓을 담아 건네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열쇠를 건네는 마법사처럼 진지하다.)


흠..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 내 생애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시간 맞춰 입장했는데도.. 이미 객석에 빈 자리가 하나도 없다. 2003년 10월에 첫 공연을 했으니 벌써 7년 가까이 돼 가는데,
1800석 규모의 극장이 꽉 차다니... 그것도 평일 저녁에.. 흠. 아침에 매표소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인상은 싹 사라진다.
허술하기는... 개뿔... 수십 명의 안내 스탭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객석을 정돈하는 걸 보고 있자니 전율마저 느껴진다.
뮤지컬 시작하기도 전에.. 압도당하는 느낌...


뮤지컬을 보고 나와서 한동안 멍하니 극장 밖에 서 있었다. 공연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노래와 춤, 오케스트라의 연주, 의상, 무대...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모든 최상의 재료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마흔이 넘도록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낯선 거리를 헤매는 내 모습이 하염없이 절망스러웠다. 언제까지 남이 만든 결과물만 침 질질 흘리며 바라볼 것인가...